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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주지역 열녀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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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ernative Title
A Study of Virtuous Women of Jeju in Joseon Dynasty
Abstract
본고에서는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한 조선시대 제주지역 열녀의 실태와 지역사회 내에서의 의미, 사회적인 수단으로 변모해나가는 열녀의 모습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였다.
열녀는 남편에 대해 정절을 지킨 여성을 말한다. 남편이 죽은 뒤 수절을 한다거나, 따라 죽는다거나, 외간 남자의 정조 유린 위협에 죽음을 무릅쓰고 대항해 정절을 지킨 여성들이다.
고려 후기에 대두된 유학의 열 관념은 조선전기에 들어서면서 재가녀자손금고법(再嫁女子孫禁錮法)이라는 제도를 통해 사대부 여성들의 재가금지와 수절강화라는 구체적인 제약을 했고, 조선시대 여성은 아들은 낳아 부계혈통을 잇고 남편과 시가(媤家)를 위해 열녀, 효부가 됨으로써 '사회적 인간'이 될 수 있었다. 유교이념이 가부장성은 여성들을 통해 가장 직접적으로 실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정책으로 삼은 것이 정표정책(旌表政策)이다.
각종 교화정책과 정표정책을 통해 정절 관념이 사회전반으로 광범위하게 정착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사회적인 혼란과 무질서가 야기되자 17세기에 들어오면서 국가적 정책과 가문의식이 결합되어 열녀에 대한 관심도 새롭게 환기된다. 양반층뿐만 아니라 열녀로 정표된 일반 백성들의 수도 이 시기부터 급증한다. 이렇듯 열녀는 가부장제 사회의 산물이자, 조선사회가 변모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함께 변화해나간다.
Ⅱ장에서는 유교사회인 조선사회에서 정절 관념이 어떻게 정립해나갔는지 살펴보았다.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들은 고려 말 배불숭유(排佛崇儒)운동의 선봉자였고, 건국초기부터 유교적 통치이념을 강조했다. 그 결과 불교는 종교적 기능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미 정치이념, 학문, 윤리문제에 있어서는 유교 중심으로 바뀌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였다.
조선은 여성들에 대한 금제(禁制)를 만들어내고, 성종대에 이르러 '재가녀자손금고법(再嫁女子孫禁錮法)'으로 집약된다.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을 얻는 것이 생계의 수단이며, 양반신분 유지의 요건이었던 사족(士族)들에게 재가녀자손금고법은 정절에 대한 가장 철저한 조치가 되었던 것이다.
정절 관념의 정착을 위해 조선은 적극적으로 열녀의 정표 정책을 시행하였다. 열녀가 되는 것은 개인은 물론 가문의 영광이며 후손에게 미치는 영향도 커서 국가에서도 신중하게 발굴, 심사, 표창하였다. 열녀로 정려가 된 후 구체적인 포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완문을 내리고, 상으로 관직 또는 비단, 곡식 등을 내리고 경제적으로 복호(復戶) 등으로 무거운 호역을 면제해주는 혜택과 자손에게 부역을 경감해준다.
조선후기는 조선전기에 이루어진 국가의 지속적인 유교 보급과 정표정책 등을 통해 정절관은 조선사회 전반에 정착되어 진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사회는 사회적인 혼란과 무질서가 계속되자 사회 질서 회복과 안정 추구의 방책으로 예를 중시하게 된다.
그리고 사대부 계층의 여성뿐만 아니라 열녀로 정표되는 평민 여성의 수가 조선 전기에 비해 급증하는 양상은 사대부 여성들에게 한정되었던 정절 관념이 전 계층에 걸쳐 광범위하게 자리 잡아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Ⅲ장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제주읍지(濟州邑誌)』, 『탐라지(耽羅志)』, 『효열록(孝烈錄)』, 『속수삼강록(續修三綱錄)』 등에 기록된 127명의 제주 열녀에 대하여 신분·시기·지역·유형별로 그 실태를 분석하였다. 여성의 호칭, 남편과 아버지의 직역을 기준으로 열녀의 신분을 추정해나갔다. 총 127명 중 40.14%인 51명이 양반이었다. 그 다음으로 상민(9.44%), 천민(7.87%), 중인(2.36%) 순으로 분포하고 있다.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는 열녀로 정표된 자의 수가 적으나 18세기부터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후기로 내려갈수록 유교가 지방까지 넓고 깊게 확산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조선사회에 유교가 정착된 시기를 17세기로 보았을 때, 열녀 또한 이 시기부터 급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제주는 육지부에 비해 1세기 정도 늦은 18세기부터 열녀로 정표된 자가 증가하기 시작하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18세기에 비해 정표자가 두 배 이상 증가한다.
18세기부터 증가하기 시작한 열녀 정표자들은 19세기에 들어서 급격히 증가한다. 19세기 정표자의 신분은 18세기와 마찬가지로 사족의 급증과 상대적인 하층민의 격감현상은 신분제 붕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20세기를 제외하고 살펴보면 천민을 제외하곤 후기로 갈수록 포상자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고 양반층의 열녀 비중이 크게 증가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 열녀 전체 추이와 비교해봤을 때 제주지역 역시 후기로 갈수록 양반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여성의 정절 숭배 이데올로기가 강해졌고, 정절 이데올로기는 후기로 갈수록 양반층에게 독점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정표자의 신분은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귀천의 구별 없이 포상되었으나 조선 전기에는 포상자의 신분이 대부분 양반층이었다. 양반층은 성리학적 윤리 이념을 교육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또한 신분제사회에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사례보다 높은 사람들의 사례가 우선적으로 보고되었으며 피지배층의 부녀자보다 지배층의 부녀자에게 경제력이 조금이라도 더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수절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성리학적 윤리이념이 피지배층에 널리 보급되어 피지배층에도 열녀의 비중이 높아진다.
조선시대 제주 열녀의 삼읍별 분포를 살펴보면 제주목이 36.22%인 46명, 정의현이 11.02%인 14명, 대정현이 6.29%로 8명이다.
조선시대 열(烈)은 마음가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즉 행(行)이 함께 뒤따랐고 이 행은 여성의 몸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총 127명의 열행 행적을 분석해보면 수절이 90명(70.86%), 자결이 37명(29.13%)으로 나타난다. 수절과 자결이라 분류는 결과론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이고, 대부분의 열행들은 여러 가지 행위가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사례가 많다. 즉 남편이 병들어 단지나 할고, 상분 등과 같이 자신의 몸을 희생 혹은 훼손시키며 간호하고 남편 사망 후 자결을 한다. 부양할 가족 때문에 자결을 시도했다가 포기하고 수절하는 경우도 있고, 남편 사망 후 수절 생활을 하다가 자식이 장성하거나 시부모가 사망한 후 어머니로써 며느리로써의 임무를 어느 정도 수행한 후 자결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성의 신체 훼손은 남편에 대한 지극한 희생과 순종으로 의미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희생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숨을 거두고 나면, 여성들은 남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나타내며 그 자신도 따라 죽을 것을 맹세하고 남은 의무를 이행한 뒤 자결함으로써 열행을 실천한다.
마지막으로 Ⅳ장에서는 앞장에서 분석한 열녀자료를 통해 이들의 지역사회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제주는 한반도와 떨어진 섬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다. 또한 토착된 민간 신앙 때문에 유독 유교가 뿌리를 내리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목사들과 유배 온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교화 활동에 힘입어 지방 유림들은 점차 자신들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유배를 온 유학자들은 제주에 머물면서 제주 사람들에게 경전을 가르치기도 하고, 유배지인 제주에서의 왕성한 집필 활동 역시 제주에 유교가 널리 퍼지는데 기여를 하였다.
육지부에 비해서 시기적으로는 많이 늦지만 제주 역시 조선사회 전체가 그러하듯 유교적 교화를 통해 정절관념이 정착화 되어가고 19세기에 이르러 열녀로 정표되는 자가 급증하게 된다.
그리고 제주는 섬이라는 특성상 육지부에서 흔히 나타나는 열행이 전혀 나타나지 않거나, 바다와 섬이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남편의 표류로 인해 열녀로 정표되는 사례에 등장하기도 한다.
열녀로 정표가 되면 정려를 받은 가문은 세금 감면과 자손의 관리 특채, 부역 면제 등의 혜택이 주어졌다. 즉 개인의 영광뿐만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정신적·물질적 이익까지 가져다준다. 그래서 양반에게는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수단이 되고, 양인에게는 과중한 호역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되며, 천민에게는 신분 상승의 유일한 통로를 의미하므로 열녀는 한 여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가족이 살아가는 방편이 되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오면 열녀로 정표를 받는 것이 개인과 가족의 큰 목표가 되었고 이것이 극단적인 열녀행태를 가져온 큰 목표가 되었고 이것이 극단적인 열녀행태를 가져온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열녀는 양반에게는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수단이 되고, 상민에게는 과중한 부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되며, 천민에게는 신분이 상승할 수 있는 통로가 되므로 열녀는 한 여자의 희생 위에 한 가족이 살아가는 방편이 되었다. 따라서 후기에 오면 열녀로 정표를 받는 것이 개인과 가족의 큰 목표가 되었고 이것이 극단적인 열녀행태를 가져 온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가문에 영광을 안겨 줄 절호의 기회가 바로 죽음이었다. 더구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 온 신분인 하층민일 경우, 온 사회가 찬사를 보내는 이 같은 죽음으로 신분 상승의 쾌감을 한 순간 느끼며 죽어 갈 수가 있었다.
본 연구를 진행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유교 사상이 육지부에서 비해 뒤늦게 정착하기 시작하여 열녀에 대한 문헌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고, 열녀로 정표된 여성들이 직접 남긴 글이 전혀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연구가 단편적이라는 한계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유교에서 여성의 정절에 극단적인 태도를 가졌는지에 대한 점과 제주사회만의 특징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을 하지 못했다. 이에 향후 자료를 보강하여 연구를 계속해 나가고자 한다.
This paper focused on the virtuous women of Jeju in Joseon Dynasty. The ruling party which founded the Joseon Dynasty consisted of a man of noble birth who emphasized moral principle. That is, they adopted neo-confucianism as the basic idea of policy and emphasized the culture of public morals in order to form the confucian system of value. So the moral standard was emphasized and various prizes were awarded to virtuous women.
The administrators gave prize to virtuous women primarily to encourage the ethical spirit that remained in the heart of the people and ultimately to establish a king-centered society by forming a male-domanated society.
The virtuous women who remains chaste to her husband in death when meeting with a danger or who keeps her integrity unsullied for a long time. Although it's not difficult to see virtuous women, it's natural for women to remain chaste to her husband in death when meeting with a danger as well as to keep chastity if whoever was great and small had been a widow in Joseon Dynasty. But then, for getting praise, admiration, accolades and written in the book, it's the increase in the number of the dead women who took care of their sick husbands beyond the call of duty and committed suicide for their husbands who had already run out instead of remaining chaste to her husband in death when meeting with a danger. Also, their descendants found ancestors' deaths honorable. The families with virtuous women were held in high esteem and set great store by the head of the hometown. So, there appeared imposters and many side effects.
According to the distribution of social position, in virtuous women, scholar took 40.14% out of it, common people took 9.47% out of it, women of low birth took 7.87% out of it.
There were a small number of virtuous women in the 15th to 17th century. But it was picked up considerably in the 18th.
Jeju is a long way off main land, so it has unique history and culture. So, it is hard to root confucian ideas be because of fork beliefs. Although Jeju was too late the time, Jeju also settled down chaste ideology by education. And, the virtuous women growed rapidly in the 19th century.
It's timeworn to reinterpret to virtuous women of this day though medieval values. However, now, we can't make ourselves so free from the traditional values of Joseon Dynasty.
Author(s)
김지혜
Issued Date
2009
Awarded Date
2009. 2
Type
Dissertation
URI
http://dcoll.jejunu.ac.kr/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0004556
Alternative Author(s)
Kim, Ji-Hye
Affiliation
제주대학교 대학원
Department
대학원 사학과
Advisor
김동전
Table Of Contents
Ⅰ. 머리말 = 1
Ⅱ. 유교문화와 정절관 = 5
1. 유교사회와 정절관념 = 5
2. 정절관과 열녀 = 9
Ⅲ. 조선시대 제주 열녀의 실태 = 19
1. 제주 열녀의 실태 분석 = 19
1) 신분과 시기별 열녀 분포 = 19
2) 제주 삼읍별 열녀 분포 = 26
2. 제주 열녀의 열행 분석 = 28
1) 열행의 의미와 분류 = 28
2) 열행 사례 분석 = 29
Ⅳ. 제주지역 열녀의 특징과 사회적 의미 = 36
1. 제주 열녀의 특징 = 36
2. 열녀의 사회적 의미 = 41
Ⅴ. 맺음말 = 45
참고문헌 = 50
부록 조선시대 제주 열녀 목록 = 54
Degree
Master
Publisher
제주대학교 대학원
Citation
김지혜. (2009). 조선시대 제주지역 열녀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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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l Graduate School >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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