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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還封事』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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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전설교
Issued Date
2017
URI
http://dcoll.jejunu.ac.kr/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0008053
Abstract
중봉이 살았던 16세기 후반기는 국내외 정세가 매우 복잡다단하였다. 국내적으로는 정치기강이 해이해져 지배층의 착취와 압박이 가중되었고, 이로 인하여 백성들은 도탄에 신음하던 때였다. 대외적으로 16세기 초엽 이래로 더욱 창궐하기 시작한 왜구의 노략질이 도를 넘어 연해 지방이 황폐화되기 시작했으며, 북방의 여진도 그 세력을 확장하여 변방을 위협하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조선은 이미 東西 朋黨이 시작되었다. 국내외적으로 혼란했던 상황 속에서 중봉은 구체적인 개혁방안인 동환봉사를 제시하였다. 또한 그는 왜구를 대비하기 위하여 備倭之策을 주장하였으며 일본이 침입하였을 때는 의병을 일으키는 등 몸소 실천으로 옮긴 행동가이기도 하였다. 중봉은 어려서부터 儒教的 선비의 교양을 엄하게 교육받고 자랐으며 직접 농사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가 관직에 나아가면서 栗谷 李珥,土亭 李之菡,牛溪 成渾 등 당대 名士들은 알게 되었고, 이들에게 師事 받으며 토론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학문을 성숙시키고 경론을 쌓게 된다. 특히 중봉은 栗谷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그의 개혁론 역시 율곡으로 영향을 받았다. 또한 重峯은 道學을 實踐窮行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살펴 볼 때, 그의 行跡은 道學精神에서 출발하지 않음이 없었다. 중봉은 1574년에 정사 朴希立, 서장관 許封을 수행하여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갔다. 그는 명나라에서 보고 느낀 것을 조천일기에 남겼으며, 조천일기를 바탕으로 하여 동환봉사를 작성하였다. 동환봉사는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으로 조천일기를 바탕으로 하되 조선의 실정에 맞게 재구성하여 작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환봉사는 실제 임금에게 올린 「팔조소」와 임금에게 올릴 목적으로 작성하였으나 「팔조소」가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올리지 않은 「십륙조소」를 포함한다. 본고에서는 동환봉사의 세계를 국가 이념과 군주의 자세, 의례와 경제, 관인의 태도 및 士民의 기풍과 국방 등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조선에서 국가 이념은 당연히 유교 이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봉은 이것을 두 편의 상소문에서 가장 먼저 논의 하였다. 「팔조소」의 '성묘배향지제'에서 이념의 현창에 대하여 말하였고, 「십륙조소」의 '격천지성'과 '추본지효'에서는 실천 덕목으로 군주에게 충과 효를 실천할 것을 건의하였다. 동환봉사에서 군주에게 요구하는 자세는 경연에서의 공부와 조정에서 조회를 하고 간언을 들으며 인재를 등용하라는 것이다. 중봉이 군주에게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은 경연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임금이 경연을 부지런히 하고 조회에서 정사를 볼 때 공부한 것을 시행한다면 '선정'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중봉은 의례를 논하면서 민폐와 경제적인 낭비가 생기는 것을 염려하였다. 이것은 왕실의 陵寢제도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陵寢제도가 지나치게 낭비된 예를 역사적으로 살폈다. 왕실의 능침제도는 함부로 입에 담기 어려운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중봉은 규모를 줄이라고 과감히 건의하였다. 또한 중봉은 명나라의 예를 들면서 제사 예절에서도 과하게 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그가 제사를 사치하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은 공자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른 것이라 할 것이다. 공자는"예는 사치하기보다는 검소한 것이 낫다"라고 한 바 있다. 중봉의 절용론은 관리들의 일상생활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부읍양지례'에서 內司의 관리들은 집안에서도 풍성하게 먹고 가난한 선비들은 그렇게 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하며 이런 풍속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개탄한다. 또한 '연음지제'에서도 조선과 중국을 비교하면서 물자의 낭비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렇다고 중봉이 절용 절약만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전들에게 녹봉을 줄 것을 주장하면서 아전이나 서리들의 부정이 구조적이라는 점도 지적하였다. 이 경우 재원의 문제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불필요한 인원을 줄이고 낭비를 없애면 아전 서리에게 녹봉을 지급할 재원 마련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중봉이 보기에 당시의 조선은 풍속이 날로 척박해지고 강상의 도가 흔들리고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임금의 교화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養民하는 정책을 먼저 하지 않고 백성을 다스리는 정책만 쓴다면 분잡하고 소란스러움만 더할 뿐이지 다스리는 데는 유익함이 없다고도 하였다. 중봉은 富國强兵論者라고 해도 좋을 만큼 국방에 대해서 건의를 많이 하였다. 우선 그는 국방을 강화하는 것으로 인구의 증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였다. 인구의 증가를 위해서 나이가 찬 딸을 결혼시키지 않는 자를 벌주거나 과부를 재가킬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노비 문제를 군대와 연결시키면서 노비 숫자를 줄여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노비 숫자를 줄여서 백만의 군대를 갖자고 하였다. 다음으로 군대의 훈련도 주장하였다. 장수는 병감을 익히고 군사는 진법을 깨우치게 하라고 하였으며 특히 군대가 백성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는 것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다. 동환봉사와 조천일기는 둘 다 중봉이 중국에 다녀와서 쓴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책에서 그려지는 중국의 실상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중에서 조천일기는 중봉이 중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사실대로 기록한 글이다. 따라서 조천일기에 나오는 중국이 실제의 모습일 가능성이 더 큰 것이 사실이다. 반면에 동환봉사는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으로 중국을 이상적인 모델로 제시하면서 조선에 성인의 도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올린 글이라고 할 것이다. 동환봉사가 조천일기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글이기는 하나 동환봉사에는 중봉이 그리는 이상적 유교국가를 그려 넣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16세기 중국의 실상은 조천일기에서, 중봉이 그리는 성인의 도가 실현되는 나라의 모습은 동환봉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본고에서는 유교의 종주국인 명을 이상적인 국가로 제시하고 조선에서 본받아야 할 개혁적인 사상을 상소로 올리거나 올리려고 한 중봉의 사상을 동환봉사를 통해 드려다 보았다. 동환봉사에 드러난 중봉의 개혁에 대한 부분들은 당시 조선의 사회상을 들여다보는 근거가 되기도 할 것이다. 더불어 동환봉사와 조천일기의 의미와 차이에서는 16세기 명의 모습을 일부분이나마 살필 수 있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중국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영향아래 놓여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사회상을 이해하기 위해 중국의 실상을 살피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Alternative Title
『Donghwan-Bongsa』 of the Study
Department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Advisor
김상조
Awarded Date
2017. 2
Table Of Contents
Ⅰ. 서론 1
Ⅱ. 본론 14
1. 조헌의 생애와 동환봉사의 역사적 배경 14
2. 조헌의 중국행과 동환봉사 17
3. 동환봉사의 세계 22
1) 국가 이념 24
2) 군주의 자세 27
3) 의례와 경제 30
4) 관인의 태도 34
5) 士民의 기풍 37
6) 국방 39
4. 동환봉사와 조천일기의 차이와 그 의미 45
Ⅲ. 結論 49
52
56
Degree
Master
Publisher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Citation
전설교. (2017). 『東還封事』硏究
Type
Dissertation
Appears in Collections:
General Graduate School >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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