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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주오현 교육사상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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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ernative Title
A Srudy On The Educational Thought Of Jeju Ohyun In The Joseon Dynasty
Abstract
본 연구는 조선시대 제주의 사액서원인 귤림서원에 배향된 제주오현(충암 김정·규암 송인수·청음 김상헌·동계 정온·우암 송시열)의 교육사상을 규명하고, 제주오현 교육사상의 사상사적 의미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제주오현이 과연 어떠한 교육사상을 지닌 인물이며, 그들이 제주와의 관련성이라는 일차적 특성 외에 어떠한 측면 때문에 제주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는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들의 교육사상과 삶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제주유림들이 200여 년 동안 이념적 푯대로 추숭(追崇)했던 제주오현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제주오현의 교육사상을 밝히고, 제주오현 교육사상의 특징을 분석하였으며, 제주오현 교육사상의 사상사적 의미를 파악하였다.
제주 귤림서원은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인해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1521년(중종 16) 사사(賜死)된 충암 김정을 기리기 위해, 1578년(선조 11) 조인후 판관이 충암묘(冲庵廟)를 건립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후 제주유림 김진용의 건의로 1660년(현종 1) 이괴 목사에 의해 장수당(藏修堂)이 건립되었고, 1667년(현종 8) 최진남 판관이 충암묘를 장수당으로 옮기면서 제향 공간과 강학 공간을 모두 갖춘 서원이 성립되었고, 귤림서원이라 현액하였다. 1669년(현종 10) 안무어사였던 청음 김상헌과 유배인 동계 정온을 추향하였으며, 1678년(숙종 4) 제주목사였던 규암 송인수를 추배하였고, 1682년(숙종 8) 사현(四賢) 서원으로 사액(賜額)되었다. 1695년(숙종 21) 유배인이었던 우암 송시열을 배향함으로써 제주오현이 완성되었다.
충암 김정은 조광조와 함께 지치주의(至治主意)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기묘사림이었다. 충암 김정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교육목적을 바탕으로 모든 공부의 본체적 의미로 '경(敬)'을 강조하였으며, 『소학』과 『근사록』을 중시하였다. 성균관의 개혁과 현량과의 설치, 향약의 실행 등 적극적인 교육개혁을 실시하였다. 제주에서는 김양필과 문세걸 등의 제주유림과 종유(從遊)하였으며, 제주인의 윤리·도덕적 교화를 위해 불교의 활용을 용인하는 등 현실주의적 교육담론을 제시하였다.
규암 송인수는 제주목사로 약 3개월간 재임했으며, 제주목사의 체임(遞任)이 문제가 되어 경상도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따라서 그동안 규암 송인수의 제주오현 배향의 정당성과 배향 이유에 관해 부정적인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본 연구에서는 다양한 사료를 통해 규암의 제주목사 부임과 사임의 과정을 살펴보았으며, 그 결과 짧은 제주목사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임을 확인하였다.
규암 송인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교육목적을 바탕으로, 『소학』과 『대학』을 중시하였으며, 충암 김정과는 달리 학문을 통한 배움을 강조하였다. 성균관 대사성 재임 때에는 유생들에게 도학(道學)과 의리(義理)를 강론하였고, 전라도 관찰사 재임 시 『소학』을 적극적으로 보급하였으며, 평생 중의경리(重義輕利)의 삶을 추구하였다. 규암은 조선 전기사림과 후기사림을 잇는 시기의 학자로서 제주오현과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충암 김정과는 은진송씨 삼현(三賢)으로, 청음 김상헌과는 임당 정유길, 상촌 신흠을 통해 영향 관계가 형성된다. 동계 정온과는 남명 조식을 매개로 영향 관계가 형성되며, 우암 송시열은 규암 송인수의 종증손(從曾孫)이다. 이러한 규암 송인수의 다양한 학적 네트워크로 인해 귤림서원 오현의 영향 연관이 설명될 수 있었다.
청음 김상헌은 1601년(선조 34) 안무어사로 파견되어 제주와 인연을 맺었다. 청음 김상헌은 존천리거인욕(存天理去人慾)의 교육목적을 바탕으로 『소학』과 『예기』를 통한 근본을 강조하였다. 청음 김상헌 역시 규암 송인수와 마찬가지로 거경(居敬)의 수양론보다는 학문을 통한 도문학(道問學)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청음 김상헌은 평생 의리적 삶을 살아온 선현(先賢)을 추숭하였으며, 시를 통한 함양과 고요함 속의 공부론을 추구하였다. 제주에서는 민본주의와 애민정신을 바탕으로 제주인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 등을 통해 제주인에게 모범적인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안무어사의 임무 중 하나인 별시시취(別試試取)를 통해 제주에서는 최초로 별시 문과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따라서 청음 김상헌이 제주에서 보여준 긍정적이고 직접적인 교육적 영향만으로도 귤림서원에 배향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평가하였다.
동계 정온은 1614년(광해 3) 영창대군을 살해한 강화부사 정항을 참수하고 영창대군을 대군의 예로 장례 지낼 것을 요청하는 「갑인봉사(甲寅封事)」로 인해 제주에 유배되었다. 인조반정으로 해배될 때까지 약 10년간 위리안치 생활을 하였다. 동계 정온은 명인륜(明人倫)의 교육목적을 바탕으로 수양론으로서의 '지경(持敬)'을 매우 강조하였다. 『소학』과 『심경』을 중시하여 마음 다스림의 교과서로 활용하였다. 평생 독실하게 독서와 저술 활동에 힘썼으며, 제주유배 생활에서 이러한 모습이 더욱 두드러진다. 동계 정온은 제주오현 중 유일하게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의 영향을 모두 받은 영남 출신의 학자이다. 따라서 동계 정온의 귤림서원 배향은 제주오현 교육사상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후대에까지 영남학파의 학풍이 제주에 전파되는 역할을 하였다.
우암 송시열은 1689년(숙종 15) 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되어 약 110일을 보내고, 서울로 압송되어 가던 중 정읍에서 후명(後命)을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우암 송시열은 성심을 다하여 거짓이 없음을 뜻하는 직(直)을 평생의 신념으로 삼았으며, 이러한 '직' 사상은 그의 교육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암은 거경(居敬)과 궁리(窮理)의 병진(竝進)을 강조하는데, 독서를 통해서도 치지(致知)와 존심(存心)의 상호작용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암 송시열도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과 같이 수양론의 경(敬)보다는 도문학(道問學)의 영역을 강조하였다. 우암은 『소학』과 『가례』를 학문의 입문처로 보고 중시하였으며, 이는 율곡 이이와 사계 김장생의 독서 차제(次第)를 수용한 것이었다. 우암은 평생 주자를 신봉하고, 벽이단(闢異端)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따라서 주자 성리학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벽이단의 기준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러한 우암의 철저한 분석적 학문 태도는 제주유배 생활에서도 한결같았으며, 우암의 이러한 학문적 태도에 제주 유림은 감발흥기(感發興起)하였을 것이라 판단된다.
제주오현의 교육사상을 모두 살펴본 결과 큰 틀에서 성리학의 공부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가치론적 측면에서 '천인합일'의 교육목적을 지향하였으며, 심성론 또는 공부론의 측면에서 볼 때 '존천리거인욕'의 교육목적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제주오현은 공부론의 방법론에서는 강조점의 차이가 있었다. 충암 김정과 동계 정온은 수양론적 측면의 '경(敬)'을 매우 중시하였으며,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우암 송시열은 상대적으로 학문을 통한 궁리(窮理)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제주오현 모두 일관되게 『소학』을 중시하였는데, 수신서(修身書)로서 『소학』을 내면화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추구하였다. 한편 교화의 교육과정으로 『소학』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제주오현은 사변적 학문 탐구를 추구한 학자적 삶보다 수기치인의 교육목적을 바탕으로 실천적 삶을 살았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실천적 삶은 도학자(道學者)의 전형이었다. 특히 일상적 삶에서도 도학적 의리사상을 실천했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행했던 대의(大義)를 위한 의리사상의 실천은 그들을 제주오현에 배향하게 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의 도학적 삶과 의리정신의 실현은 성리학을 통해 배운 내용을 실제의 행동으로 옮긴 것으로 지행병진(知行竝進)의 전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서원에 향사된다는 것은 '선생'으로 표시되는, 만인(萬人)이 수긍하는 교육적 인간상이라는 뜻과 같다. 따라서 제주 유림은 귤림서원에 가면, 엄연히 제주오현을 보는 듯하여 제주오현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어, 덕성과 학문의 함양 의지가 발현되었을 것이다[入其堂儼然若見其人]. 이로써 제주의 문풍(文風)이 진작되었으며, 그 결과 귤림서원을 기점으로 공부한 제주유림의 과거 합격자가 매우 증가하였다. 그리고 제주오현의 소학지도(小學之道) 중시 경향이 제주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제주오현의 의리사상은 제주의 위정척사운동과 항일운동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본 연구를 통해 제주오현의 교육사상과 특징, 그리고 제주에 끼친 영향을 밝혀냄으로써 제주오현이 오랫동안 제주의 사표로 추앙받아온 이유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제주오현의 귤림서원 배향이 제주와 중앙의 상호 작용의 결과라는 것이 충분히 드러났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본 연구가 조선시대 제주교육사상사의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This research was conducted with the purpose of investigating the educational thought of Jeju Ohyun, Chungam Kim Jeong, Kyuam Song Insu, Chugeum Kim Sangheon, Dongye Jeongon and Wooam Songsiyol, who had been glorified in Gyulim Seoweon, one of the bestowed Seoweon schools, and revealing the meaning of educational thought of Jeju Ohyun in the context of history of ideas. This research aimed at investigating Jeju Ohyun with respect to their educational thoughts and the additional reason why they were glorified in Gyulim Seowon excluding their relation to Jeju as the primary fundamental feature. The reason is that only by understanding their education thoughts and life can lead to the complete exhibition of Jeju Ohyun whom Confucian scholars in Jeju had worshiped(追崇) as ideological idea for 200 years. There in Jeju had worshiped(追崇) as ideological idea for 200 years. Therefore, this research revealed the educational thoughts of Jeju Ohyun, analyzed the characteristics of the educational thoughts of Jeju Ohyun and identified the significance of them in the context of history of ideas. The establishment of Gyulim Seowon in Jeju had started initially as Cho Inhoo who was a judge established Chungam shrine(冲庵廟) in 1578 (11th year of King Seonjo) to praise Chungam Kim Jeong who had been exiled to Jeju due to Gimyosahwa and been executed(賜死) in 1521 (16th year of King Jungjong). After this, Changsoo academy(藏修堂) was established by the local governor Igoat in 1660 (First year of King Hyeonjong) because of the proposal made by Jeju Confucian scholar Kim jinyong. In 1667 (8th year of King Hyeonjong) the judge Choi Jinnam relocated Chungam shrine to Changsoo academy leading to the establishment of Seowon with the ritual place and academic place lastly naming it as Gyulim Seowon. In 1669 (10th year of King Hyeonjong) Chugeum Kim Sangheon who was government official and Dongye Jeongon who was an exile were praised, Kyuam Song Insu who was the local governor of Jeju was praised in 1678 (4th year of King Sukjong, and it was lastly bestowed(賜額) in 1682 (8th year of KIng Sukjong). In 1695 (21th year of King sukjong), Wooam Songsiyol who was an exile was praised and Jeju Ohyun which means five sages in Jeju led to the completion. Chungam Kim Jeong was Gimyo sarim who struggled to realize the ideal of ultimate governance(至治主意) with Jo Gwangjo. On the basis of holism(天 人合一) as educational purpose, Chungam Kim Jeong emphasized 'Kyeong'(敬) as fundamental aspect of all kinds of studies, and laid stress on Sohak and Geunsarok. He also executed active educational reforms such as reformation of Sungkyunkwan, instituion of the exam Hyunranggwa and implementation of the instituion Hyangyak. In Jeju, he got acquainted with Kim Yangpil and Moon Syegeol who were Jeju Yulim, and proposed practical educational discourse such as approval of Buddhism for the purpose of ethical and moral edification for people in Jeju. Kyuam Song Insu served as local governor in Jeju for 3 months but he was soon to be exiled to Sacheon in Gyeongsang province for dismissal(遞 任). For this reason, meanwhile public opinion on the justification of praise on him and the reason for praise was dominantly negative. In this research, through analysis on various historical records, his appointment and dismissal as local governor in Jeju was investigated, which revealed that he was obliged to rule for such a brief time. On the basis of self-cultivation and ordering of of society(修己治人) as educational purpose, Kyuam Song Insu put importance on Sohak and Daehak and on the contrary to Chungam Kim Jeong emphasized learning itself through studies. During his time as Sungkyunkwan Daesasung, he gave a lecture on Dohak(道學) and Uiri(義理) to students and during his service as local governor in Jeollado province actively disseminated Sohak while pursuing Joongikyungri(重義輕利) during his lifetime. As a scholar connecting Sarims in early and late Joseon dynasty, solid networking between him and Jeju Ohyun could be established. Influencing relationship was formed with him and not only Chungam Kim Jeong through Eunjin Song Family relationship but also with Chungeum Kim Sangheon through Imdang Jeong Eugil and Sangchon Shin Heum. With Dongye Jeongon, relationship is formed via Nammyeong Cho shik. Wooam Songsiyol is a great-grandson of his brother. On this context, interconnection of influences of Ohyun of Gyulim Seowon can be elucidated. Chungeum Kim Sangheon started to have relation with Jeju since he was sent to Jeju as goverment official in 1601 (34th year of Seonjo). On the basis of Confucius Joncheonliguinyok(存天理去人慾) as educational purpose, he emphasized fundament through Sohak and Yegi. As with Kyuam Song Insu, he put importance on aspects of Domunhak through studies rather than self-cultivation. He worshiped precedent sages living life as Uiri during his whole life time and also pursued theory of study through poetics. In Jeju, he manifested himself as exemplary teacher to people in Jeju exhibiting positive attitudes on the basis of Minbon thought and Aemin spirit. In addition, through Byulsisichi(別試試取) he produced outstanding individual who was the first successful applicant to Byulsi, which was one of the duties given to government official. Therefore, he was appreciated as a respectful figure who could be glorified in Gyulim Seowon without any dispute even only with his educational and positive influence in Jeju. Dongye Jeongon was exiled to Jeju in 1614 (3th year of Gwanghae) for Gabinbonsa(甲寅封事) requesting execution of government official Jeong Hang in Gangwha who murdered Yeongchangdaegun and having a funeral with the rights that he deserved as Daegun. He lived suffering Wirianchi for 10 years until he was set free from that through Injobanjeong Dongye Jeogon emphasized Jigeong as theory of self-cultivation on the basis of Myunginrun (明人倫). He also utilized Sohak and Daehak as mind-calming material putting a lot of importance on those. During his whole life time, he put efforts on reading and writing, which were prominently exhibited during his exile in Jeju. He is the only scholar bearing Yeongnam as origin being influenced by both Nammyeong school and Toegye school. Thus, sanction on praise on him in Gyulim Seowon could lead to securement of diversity of educational thoughts of Jeju Ohyun while functioning as intermediate propagating academic traditions of Yeongnam school to Jeju even to after ages. Wooam Songsiyol spent approximately 110 days in Jeju during his exile because of his proposal of the opposition on the installation of prince, later being executed(賜死) in Jeongeup on his transfer to Seoul. During his lifetime, Wooam Songsiyol pursed Jik(直), which means being sincerely truthful, and the thought of 'Jik' was his educational goal. Wooam emphasized Gurgyeong (居敬) and Byeongjin(竝進) while appreciating that through reading Chiji(致知) and Johnshim(存心) interacts. Therefore, as with Kyuam Song Insu and Chungeum Kim Sangheon, he emphasized the aspects of Domunhak rather than Kyung of theory of self-cultivation. Wooam appreciated Sohak and Garye as an introduction to study, which was under the influence of reading procedure of Yulgok Lee Yi and Sagye Kim Jangsaeng. Wooam worshiped Zhu Xi for his lifetime and regarded excluding heresy as his duty. Therefore, he analyzed vigorously Neo-Confucianism of Zhu Xi, from which he determined standards for excluding heresy. His vigorously analytical attitude on study was the same even in his exile, which can be interpreted as inspiration to Jeju Yurim. Taking an overview of educational thoughts of Jeju Ohyun, it was revealed that they were not largely deviating from idea of study in Neo-Confucianism. In axiological aspect, holism was pursued as educational aim. In aspect of mentality theory or theory of study, Joncheonliguinyok(存天理去人慾) was pursued as educational goal. However, methodological viewpoints on theory of study were different among those of Jeju Ohyun. Chungam Kim Jeong and Dongye Jeongon largely emphasized 'Kyung' in self-cultivating viewpoint. On the other hand, Kyuam Song Insu, Chugeum Kim Sangheon and Wooam Song Siyol relatively put an emphasis on pursing knowledge through study. Jeju Ohyun consistently emphasized Sohak regarding it as Sooshinseo(修身書) to be internalized and seeking for Wikijihak(爲己之學). Meanwhile, they also highlighted Sohak as curriculum for edification Jeju Ohyun were figures with practical acts on the basis of self-cultivation and ordering of of society not like other sages who longed for speculative academic investigation. Their life is a model of scholars of Do. Particularly, not only for their practice of Uiri in daily life, their practice of Uiri on great cause on behalf of their lives is the primary reason why they were glorified in Jeju Ohyun. In this context, their life pursuing Do and their practice of Uiri can be appreciated as the exemplary model of Jihaengbyungjin(知行竝進) which means acting what one comes to know in Neo-Confucianism. Being praised in Seowon signifies that one is the educational figure everyone respects being called 'Seonsaeng'. Thus, Yulim in Jeju might have been inspired just to be like Jeju Ohyun when they went to Gyulim Seowon like they are facing them virtually(入其堂儼然若見其人). By this, academic fashion was motivated in Jeju, leading to production of many passers of the state examination since establishment of Gyulim Seowon. Also, trend on utilizing Sohak which Jeju Ohyun emphasized seemed to influence Jeju. On top of that, their idea of Uiri came to be ideological foundation for Wi eongchucksa movement and anti-Japanese movements in Jeju. Through this research, revealing education thoughts of Jeju Ohyun, their characteristics and influence on Jeju, the reason why they were worshiped as sage in Jeju for a long time could be concretely idnetified. Also, it can be sufficiently justified that glorification of Jeju Ohyun in Gyulim Seowon is the interaction between Jeju and the central government. This research seemd to pave foundation for extension of understanding on history of educational thoughts in Jeju in Joseon dynasty.
Author(s)
강동호
Issued Date
2021
Awarded Date
2021. 8
Type
Dissertation
URI
https://dcoll.jejunu.ac.kr/common/orgView/000000010399
Alternative Author(s)
Kang, Dong Ho
Affiliation
제주대학교 대학원
Department
대학원 교육학과
Advisor
양진건
Table Of Contents
I. 서 론 1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1
2. 선행연구 검토 및 시사점 6
1) 선행연구 검토 6
2) 선행연구 검토의 시사점 18
3. 연구의 내용과 방법 20
1) 연구의 내용 20
2) 연구의 방법 21
II. 제주오현 교육사상의 사상적 연원과 귤림서원의 형성 28
1. 제주오현 교육사상의 사상적 연원 28
1) 성리학 교육사상의 이해 28
2) 성리학 교육사상의 조선조 전개와 특징 37
2. 조선시대 서원의 성립과 전개 43
1) 조선시대 서원의 성립 43
2) 조선시대 서원의 전개 45
3) 귤림서원의 성립 53
4) 제주오현의 봉안 59
III. 충암 김정의 교육사상 66
1. 충암 김정 교육사상의 배경요인 67
1) 충암 김정의 생애 67
2) 충암 김정의 학문적 연원 69
2. 충암 김정의 이기심성론 72
3. 충암 김정의 교육사상 81
1) 천인합일의 교육목적론 81
2) 교육방법과 내용 84
4. 충암 김정의 교육실천 97
1) 학교교육의 개혁 97
2) 재덕겸비(才德兼備)의 스승관 99
3) 과거제도의 개혁 현량과 설치 102
4) 향약의 시행 105
5. 제주교육에 끼친 영향 109
1) 정신사적인 측면의 영향 109
2) 제주유학자와의 교유 111
3) 제주인을 위한 현실주의적 교육담론 113
IV. 규암 송인수의 교육사상 116
1. 규암 송인수 교육사상의 배경요인 117
1) 규암 송인수의 생애 117
2) 제주목사 부임과 체임(遞任) 118
3) 규암 송인수의 학문 연원 124
2. 규암 송인수의 이기심성론 128
3. 규암 송인수의 교육사상 133
1) 수기치인의 교육목적론 133
2) 사리지의(事理之宜)를 위한 공부론 136
4. 규암 송인수의 교육실천 141
1) 학교의 진흥과 사표로서의 송인수 141
2) 교화를 중시한 치인(治人) 교육 146
3) 애민정신과 중의경리(重義輕利)의 실천 150
5. 규암 송인수의 추숭과 귤림서원 배향 155
1) 규암 송인수의 추숭 과정 155
2) 규암 송인수의 귤림서원 배향의 의미 162
V. 청음 김상헌의 교육사상 169
1. 청음 김상헌 교육사상의 배경요인 170
1) 청음 김상헌의 생애 170
2) 청음 김상헌의 학문적 연원 171
2. 청음 김상헌의 이기심성론 176
3. 청음 김상헌의 교육사상 178
1) 존천리거인욕의 교육목적론 178
2) 교육내용과 방법 182
4. 청음 김상헌의 제주에서의 교육실천 204
1) 민본주의(民本主義)와 애민정신(愛民精神) 204
2) 인재의 등용과 제주에서의 시재설행(試才設行) 210
VI. 동계 정온의 교육사상 215
1. 동계 정온 교육사상의 배경요인 216
1) 동계 정온의 생애 216
2) 동계 정온의 학문적 연원 217
2. 동계 정온의 이기심성론 220
3. 동계 정온의 교육사상 228
1) 명인륜(明人倫)의 교육목적론 228
2) 교육방법과 내용 234
4. 동계 정온의 귤림서원 배향의 의미 252
VII. 우암 송시열의 교육사상 258
1. 우암 송시열 교육사상의 배경요인 258
1) 우암 송시열의 생애 259
2) 우암 송시열의 학문적 연원 260
2. 우암 송시열의 이기심성론 264
1) 이기론 264
2) 심성론 267
3. 우암 송시열의 교육사상 272
1) 교육목적으로서의 '직(直)' 272
2) 교육방법과 내용 276
4. 제주교육에 끼친 영향 293
VIII. 제주오현 교육사상의 특징과 교육사상사적 의미 296
1. 제주오현의 영향연관 297
2. 제주오현 교육사상의 특징 303
1) 제주오현의 주리론적 이기론 303
2) '존덕성'과 '도문학' 강조의 차이 305
3) 소학지도(小學之道) 중시 307
4) 도학적 의리사상의 실천 311
3. 제주오현 교육사상의 사상사적 의미 317
IX. 요약 및 결론 326
1. 요약 326
2. 결론 332
참고문헌 337
ABSTARCT 355
Degree
Doctor
Publisher
제주대학교 대학원
Citation
강동호. (2021). 조선시대 제주오현 교육사상 연구
Appears in Collections:
General Graduate School > Convergence Education Software
Graduate School of Social Education > Natural and Cultural Heritage Educati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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